그때에 20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서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는 질문을 받으시고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21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22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날을 하루라도 보려고
갈망할 때가 오겠지만 보지 못할 것이다.
23 사람들이 너희에게 ‘보라, 저기에 계시다.’,
또는 ‘보라, 여기에 계시다.’ 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나서지도 말고 따라가지도 마라.
24 번개가 치면 하늘 이쪽 끝에서 하늘 저쪽 끝까지 비추는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날에 그러할 것이다.
25 그러나 그는 먼저 많은 고난을 겪고
이 세대에게 배척을 받아야 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느냐는 질문은 순수하든 안 순수하든 생각해 볼만한 질문이다.
그런데 이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하고 답변하셨다.
그러면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여기는 사람들에게 이 말씀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말이 된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
22절부터는 “사람의 아들의 날”에 관해 말씀하신다.
‘사람의 아들’의 날 혹은 ‘인자의 날’이다.
하느님의 나라에 관해 계속 말씀하시는 것 같았는데, 비슷하지만 차원이 다음과 같이 서로 다르다.
22절 이전은 이미 시작됨을(already)
22절 이후는 미래의 완성(not yet)를 이야기한다.
- 20–21절: 현재적 하느님의 나라
- 22–25절: 종말론적 인자의 날
그래서 오늘 복음은 하느님 나라의 도래와 완성이라는 종말론적 긴장을 보여준다.
바리사이들의 질문은 단순히 시점, 곧 하느님의 나라를 목격하는 시점이 언제인지를 여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답변해 주신다.
신학교에서 ‘이미와 아직’이라는 신학 용어를 배우고 나서,
기억에 각인되었는데,
그 이유는 ‘이미와 아직’이라는 용어로 하느님 나라의 존재를 명쾌하게 설명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그 의미를 더 정확히 알게 되니 기쁘다.
사실 나도 단편적으로만 하느님 나라에 관해 사고했던 것 같다.
마치 주님의 기도를 하면서도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를 습관적으로 바치듯.
겨짜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처럼, 하느님 나라는 고정된 그 무엇이 아닌 것이다.
이 땅에서 신비롭게 현존하는 하느님 나라.
그리고 마침내 완성되는 하느님 나라.
내 사고를 넘어서는 말씀이다. 신비다.
왜냐하면 이 땅에서 펼쳐지는 하느님 나라에 관해서 잘 믿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