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으로부터 용서

사순 제3주간 화요일(마태 18,21-35; 다니 3,25.34-43)

주제: 아버지와 같이 용서하기

주제문: 구원의 하느님께 받은 용서를 기억하고, 나에게 잘못한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합시다


1. 체험하기 전까지 잘 모르는 경우

+ 찬미 예수님! 우리는 체험하기 전까지 잘 모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최근에 50대에 어떤 분하고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분이 요즘 고민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요즘따라 상대방 이름이 안 떠오르고, 미사 중에 어떤 특정 부분이 통째로 기억이 안 난다는 것입니다. 정밀 진단을 하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나이가 들면서 생기는 증상 같아 보였습니다. 어릴 때나 젊을 때는 일종의 ‘건망증’ 같은 것을 들어 보고, 아니면 영화 또는 치매 환자를 겪으면서 저럴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막상 본인이 그것을 체험하게 되면, 그 전과는 다른 반응을 하기도 합니다. 큰 걱정이 앞 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기억하는 데에 어려움에 놓인 이들의 심정을 이해하게 됩니다.  오늘 말씀 또한 우리는 ‘이심전심’이 아니 ‘이체전심’ 곧 나의 체험이 서로의 마음을 알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됨을 발견하게 됩니다. 

2. 말씀의 의미

오늘 제1독서는 다니엘 예언서의 말씀으로, 바빌론의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이 세운 금상에 절하기르 거부하여 불가마에 던져진 하난야, 미사엘, 아자르야 중 아자르야가 불길 한가운데에서 바친 기도 내용입니다. 절망적인 위기 속에서도 원망 대신 자신을 돌아보고 하느님의 자비에 전적으로 신뢰를 두며 기도를 바칩니다. 이 기도는 고난 속에서도 하느님의 정의를 인정하고 민족의 죄를 고백하며 자비를 청하는 공동체적 참회 기도의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지 않지만, 현재 겪고 있는 시련이 하느님을 저버린 결과임을 인정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유배와 박해를 겪고 보니, 나의 죄와 하느님의 정의 그리고 자비가 무엇인지 보이게 된 경우라 하겠습니다. 그동안은 단순히 예배를 통해 심정적으로 알고 있었다면, 이제는 몸소 ‘피부’로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보면, 하느님께서 어느 정도로 이스라엘을 용서했고, 사랑했는지가 드러납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가 예수님께 형제의 죄를 몇 번 용서해 주어야 하는지 여쭙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이에 예수님은 “일흔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대답하시며, ‘매정한 종의 비유’로 그 이유를 풀이해 주십니다. 매정한 종은 어떤 임금에게 만 탈렌트라는 천문학적인 빚을 지게 됩니다. 만 탈렌트는 지금으로 따지면 약 6조 원 정도라고 합니다. 임금은 이 빚을 탕감해 주시만 매정한 종은 동료의 작은 빚을 용서하지 않게 됩니다. 이 비유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얼마나 큰 사랑으로 용서하셨는지를 보여주며, 동시에 하느님의 자비를 입은 우리 또한 타인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일깨워 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마지막에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마태 18,35)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 겉으로의 용서가 아닌, 진심으로의 용서를 말씀하십니다. 이는 상대방의 잘못을 단죄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인간의 본성으로 나에게 큰 상처를 준 사람을 진심으로 용서하기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가 받은 하느님의 무한한 용서를 기억하라고 가르칩니다. 즉, 내 힘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하느님의 사랑으로 용서하는 것입니다. 결국 화가 나는 감정은 남아있을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의 행복을 빌어주기로 마음먹는 것이 바로 마음으로부터 용서입니다. 

3. 실천사항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구원의 하느님께 받은 용서를 기억하고, 나에게 잘못한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합시다. 우리는 이미 용서의 체험을 세례성사와 고해성사를 통해 하느님으로부터 경험했습니다. 만 탈렌트라는 천문학적인 죄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이것을 이스라엘 백성처럼 꼭 ‘피부’로 느껴야지만, 되찾은 작은 아들처럼 꼭 ‘경험’할 때까지 갈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에 찬미를 드리며, 우리 또한 하느님의 은총으로 이웃에게 자비로운 이가 되기로 다짐합시다.